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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읽은책이야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박민규

by --한소리 2018.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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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박민규


정말 오랜만에 완독한 책입니다.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었어요.

무슨 책을 읽었다구요?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는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클래식 곡입니다.

제가 예전부터 즐겨듣던 곡입니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우아하고, 서정적이고, 절제된 음율 속에서도 향수를 자극하는 느낌이 있어요. 파반느는 옛 무곡의 한 형식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기교나 화려한 스케일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정서적인 감동과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라벨의 초기 명곡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버전은 앙상블 디토가 디토페스티벌에서 앵콜곡으로 연주한 버전입니다. 같이 들어보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링크를 옮겨와볼게요.

이 곡이 이 소설의 내용과는 무슨 관련성이 있었을까요?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도대체 어떤 '왕녀'가 나오는가. 죽었다면 왜 죽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시작과 끝이 연결되는 '원형'의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첫 도입부는 소설의 시작이자, 결국 소설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결말을 안고 소설은 시작되는 것이죠. 이 소설에는 크게 세 명의 남자가 등장합니다. 삼류배우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면서, 총각 행세를 하다가 결국 어머니와 자신을 내친 아버지, 그리고 버림받고 상처받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가진채 살아가는 나.라는 인물과. 못생겼다는 이유로 평생 사랑받지 못한채, 세상의 조롱을 뱃속에 칼날처럼 품은채 살아가는 그녀. 그리고 유쾌하지만 무엇인가 모를 상처와 우울을 가진 요한이라는 인물로 시작합니다. '나'는 친구의 소개로 백화점 지하주차장의 주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하 4층 담당인 요한을 만나게 되고.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만큼 추한 외모를 가진 그녀를 '나'는 왜 사랑하게 된 것일까요?

평생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며 살아가던 그녀의 마음의 '나'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박민규 작가

소설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음률처럼 차분하면서도, 절제되고, 가라앉은 슬픔을 안고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스토리의 흡입력이 썩 뛰어난 소설은 아니지만, 인물들이 풀어내는 삶에 대한 통찰이 흥미로운 소설이었어요. 특히 요한이란 인물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새겨두고 기억할 것들이 꽤 있었습니다.

어제 다 읽고, 오늘 아침에 다시 한 번 소설을 빠르게 훑으면서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직접 타이핑하였어요. 소설을 읽은 분들도 계실테고, 안 읽은 분들도 계실 테지만, 그 누구라도 읽는다면 공감할 생각들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일 뿐이니까. 그것이 자신의 고통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인간도 타인의 고통에 해를 입지 않는다.

그녀를 생각한다. 만날 수 없으므로 죽은, 나의 왕녀를 생각한다. 실은 죽은 지 오래였던 나를, 돌이켜본다. 내게 남은 건 과연 무엇일까. 과연 이 글을 나는 끝까지 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사막의 바람처럼 우릴 휩쓸고 지나갔다. 헤어진 모래처럼 서로를 찾을 수 없다면, 다시 저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이 다시 데려다 주기만을, 나는 기다리고 기다릴 것이다. 검푸른 드레스를 입고 선 그녀의 곁으로... 이제는 죽은, 왕녀의 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머니에 대해 얘기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아버지에게도 과연 '아버지만의' 어머니가 있었을까? 아버지에게도 그런 우아한, 혹은 우아했던 어머니가 한순간이라도 존재했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면 두 사람에 대한 나의 연민은 더더욱 깊어진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미남이었고, 어머니는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던 삼류 배우가 발견한 최고의 숙주였을 것이다. 아마도

늘 그랬다.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개의 창을, 간단한 하나의 창으로 다듬는 능력을 요한은 갖고 있었다.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누구에게라도 사랑을 받는 인간과 못 받는 인간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만큼이나 커.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실은 대부분의 여자들...그러니까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거나... 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과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 건 실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기 때문이지. 너무 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알아?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야.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 거지. 안 그래도 다들 시시하게 보는데 자신이 더욱 시시해진다 생각을 하는 거라구. 실은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없는 여자일수록 가난한 남자를 무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야.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더더욱 불안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거야.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거라구. 그래서 와와 하는 거야. 조금만 이뻐도 와와, 조금만 돈이 있다 싶어도 와와, 하는 거지. 역시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 없는 인간들에겐 그래서 자구책이 없어. 결국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면서 결국 그렇게 평생을 사는 거야.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말이야. 이 세계의 비극은 그거야. 그렇게 서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보잘것없는 인간들은 보잘것없는 인간들과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지.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의 자아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그리고 평생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살아가는 외로운 존재라는 것도요. 빼어난 외모, 혹은 좋은 자동차, 좋은 집, 멋진 옷 같은 것들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요. 빼어난 외모를 가졌다 한들, 비싸고 멋진 자동차를 가졌다 한들,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는 다면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었을까요? 사실은 자기 모순적인 얘기일지도 모르겠어요. 빼어난 외모라는 말 앞에 붙은 '빼어난'이라는 말. 멋진 자동차 앞에 붙은 '멋진'이라는 말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과 잣대를 기준으로 하는 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평생 사람은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소설 속에 나온 비유에 따르자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전류'를 통해 평생 공급받지 못한다면 언제든 빛을 꺼뜨려버리고 어두워질 수 밖에 없는 전구같은 것이구나.라는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과 관계에 대한 희망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가려진 인간의 나약함과 외로움 같은 것들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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